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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의 성지와 사적지 (2)

모방 신부와 기해박해 관련 사적지

 
1. 잊혀져 가는 만주의 '마가자' 교우촌
 
1801년의 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복음의 씨앗은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였고, 권기인, 신태보 등 새 지도자들은 1811년에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올려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이여진(요한)이 고난의 밀사 역할을 맡아 1811년과 1813년 두 차례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1816년 겨울에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22살의 청년으로 이 일을 자임하였다.
 
이후 정하상은 1837년까지 21년 동안 밀사로 활동하였다. 또 1824년 말에는 역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2년 뒤에는 하급 마부로 북경을 왕래하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1819년에 순교한 조숙(베드로)과 권 데레사 부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 그리고 성 현석문(가롤로) 등이 밀사들을 도와주었다. 1825년경에 정하상은 조선 신자들이 두 번째로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을 북경에 전달하였다.1) 이 서한은 그 후 교황청에 전달되어 여러 성직자들을 감동시켰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의 신자들이 얼마나 성직자 영입을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교우들은 삶에 지치고 비탄 속에 잠겨있어 슬픔과 고뇌가 점점 가슴을 억누릅니다. 북경 주교님께서는 여러 차례 저희들의 청원을 들으셨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성직자를 보내주지 못하였습니다. 아아! 이러한 불행은 저희 죄인들이 얻은 것인 만큼 다른 이들을 원망해서는 안되고, 저희 스스로를 책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겸손되이 청하오니 먼저 성직자를 파견해 주시고, 아울러 이 비참하고 불쌍한 교회의 장래를 영신적(靈神的)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가 독립 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샴(태국)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이 소식을 듣자마자 페낭 신학교 출신인 왕(王) 요셉과 함께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그때 샴 교구의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또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서는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2) 신부에게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1833년 겨울(양력 1834년 1월), 유진길과 조신철을 봉황성 책문(柵門, 중국측 변문)에서 만나 조선에 입국하였다. 반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10월에야 내몽고인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 도착하여 머무르다가 연락을 받고 1년 만인 1835년 10월 7일에 그곳을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서부 달단 요녕성의 '마가자'(馬架子, 일명 펠리구)라는 교우촌에서 과로로 죽고 말았다.
 
이때 서만자에 있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마가자로 달려가 "주교의 거룩한 시신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교우들 묘역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이로서 마가자 교우촌은 조선에 입국하기를 그토록 갈망하면서 고난을 참아낸 초대 교구장이 부활을 기다리며 잠든 곳이 되었다. 그 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용산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는데, 모방 신부가 그의 무덤 앞에 주교의 중국 성인 소(蘇)자를 기록한 묘비를 세워놓았던 탓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3)
 
 
2. '후동'의 첫 교구청과 신학교
 
모방 신부는 본래 중국의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뒤인 1833년 3월 9일에 조선 선교를 희망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는 주교의 시신을 안장한 뒤 곧바로 마가자 교우촌을 떠나 책문으로 가서 정하상, 조신철 등을 만났다. 그런 다음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 밤에는 의주 변문(邊門)에 도착하였고, 비밀리에 성벽의 수문을 통과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전해 받은 돈으로 서울의 '후동'(后洞)4)에 새 집을 마련하고 돌보아 왔는데,5) 유방제 신부와 모방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여 거처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또 모방 신부는 1836년 초부터 자신이 선발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이 집으로 불러올려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신학 교육이 시작된 곳이었다.6)
 
샤스탕 신부는 1837년 1월 1일(음력 1836년 11월 25일) 조선에 입국한 뒤 일시 후동에 있다가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837년 12월 18일(음력 11월 21일)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후동의 거처에 머물렀으며, 1838년에는 정하상 등 4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자신의 거처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7) 그 결과 후동의 집은 조선 최초의 교구청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신학교 구실도 하게 되었다.
 
 
3. 비밀리에 형성된 교우촌과 공소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이래 끊임없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때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동산리) 출신으로 춧날 천주가사 [옥중제성](獄中提醒)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교우촌 중에서 유명한 수리산(修理山,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의 담배촌)과 골배마실(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이 들어있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이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1837년경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이보다 훨씬 전인 1832년경에 성 최경환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8)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9)
 
수리산이 성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신앙이 서려있는 곳이라면, '골배마실'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10)
 
앞에서 말한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지금의 한덕골은 용인읍에서 미리내 방향(남쪽)으로 가다가 6km 쯤에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다시 원천(샘골) 부락을 지나면 영보 수녀원과 신원 컨트리 클럽 간판이 나타나고, 더 왼쪽으로 가다보면 한덕골 본동이 나타난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초에 김제준의 방문을 받고, 7월 경에 골배마실실을 들러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은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은이 공소는 일찍부터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곳이며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 최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4. 구산, 남한산성 성지와 갓등이 교우촌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는 거북뫼 곧 '구산'(龜山,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로 현 하남시)이 있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11) 이렇게 하여 남한산성은 1801년 12월 27일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동문 밖에서 순교한 이래 두 번째로 순교자들을 탄생시킴으로써 유명한 순교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우들이 체포되기 전에 김성우는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에 체포되었으며,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명목 아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석방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기까지 하였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의 순교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오히려 순교가 가까워졌음을 알고 즐거운 낯으로 질문에 답하곤 하였다. 결국 포도대장은 음력 윤 3월 18일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다. 옥중에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이 순교를 각오한 단 한 마디였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12)
 
이처럼 모방 신부의 순방지들이 나타나는 데 비해 샤스탕 신부가 방문한 공소나 교우촌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앵베르 주교가 방문한 곳 중에서는 유일하게 "갓등이"(旺林, 경기도 화성군 왕림리) 공소가 기록에 나타난다. 언제부터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수리산, 골배마실 등과 같이 대략 1830년을 전후하여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며, 그 무렵에는 인근에도 교우촌들이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그 후 이곳에 교회 전답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인천 출신인 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회장에게 이곳에 거처하면서 교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서적들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천주가사 [삼세대의](三世大義)를 저술하여 신자들에게 순교 신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13)
 
1838년 12월 20일부터 다음해 초까지 앵베르 주교는 서울을 떠나 인근의 공소들을 순방하였다. 처음 수리산 공소에 들러 성탄 축일을 지낸 그는 1839년 1월 25일에는 갓등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리산에 있을 때부터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갓등이 공소에서는 다시 서울의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14) 이에 서둘러 상경한 그는 되도록 많은 신자 집단을 방문하고 성사를 주려고 하였으나,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과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자 일단 지방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주교의 피신을 도운 것은 홍주 출신의 교우 손경서(안드레아)였다. 그는 비밀리에 서해안 가까이에 있는 수원의 '송교'(松橋,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마을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으며, 주교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피신하였다.15) 그 동안에도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에 의해 후동 주교의 집을 지키던 정하상, 수리산의 최경환 회장 등이 체포되었다. 이어 1839년 8월 10일에는 마침내 김순성이 포졸들을 이끌고 온 것을 안 앵베르 주교가 자수하였고, 9월 6일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5. 끝없는 순교의 터전
 
기해박해로 서소문새남터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지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대역 죄인의 판결을 받고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새남터 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았다.
 
이들 세 명의 시신은 처음 3일 동안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용감한 신자들은 20일만에 그 시신을 수습하여 '노고산'에 안장하였으며, 1843년에는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의 관악산 줄기)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1901년 시복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졌으며, 1967년 시성 작업이 추진되면서 다시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16)
 
이 밖에도 기해박해와 관련된 순교터로는 앞서 말한 남한산성과 포도청이 있고, 최해성(崔海成, 요한)이 순교한 강원도 원주, 전 베드로가 순교한 공주 감영의 옥이 있다. 뿐만 아니라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때 체포되어 12년 동안이나 전주 감영에 갇혀있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등 5명의 신자들이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 순교하였다. 신태보는 이에 앞서 샤스탕 신부의 명으로 옥중 수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들 5명의 처형 장소가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해성고등학교)로, 1801년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와 가족들이 순교한 곳이다.17)
 
기해박해의 마지막 순교터는 '당고개'(堂峴, 용산구 원효로 2가)였다. 박해도 거의 끝나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 이곳에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중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과 이문우 등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 당고개는 본래 형지가 아니었으나, 상인들이 곧 닥쳐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정에 요청한 결과 처형 장소가 옮겨지게 된 것이다.
 
 
1) 이 1824년 말(또는 1825년 말)의 서한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1826년 12월 3일자로 번역된 라틴어본'이 보관되어 있다.
2) 유방제 신부는 중국 사천 출신으로 이탈리아 나폴리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곳 명부에 본래의 성명인 '여항덕'(余恒德)이 적혀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유방제'는 그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던 성명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훗날 신자들의 문초 기록이나 증언 기록에 여항덕 신부의 성명이 모두 유방제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경향잡지] 제25권 718호와 720호, 1931년 9-10월.
4) 서울에서 '후동'(뒷골, 後洞 또는 后洞)이라 불리는 곳은 종로구 통의동, 서린동, 청진동, 인사동과 중구 주교동 등지에 있었는데, 그중에서 주교동의 뒷골(즉 樂善坊의 後洞)은 현재까지 그 이름이 남아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후동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5) [추안급국안], 유진길추안, 1839년 8월 7-8일, 범세형 공초, 신자들은 이 후동의 집을 '정하상의 집'으로 불렀다.
6)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자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45면; [推案及鞫案], 1839년 8월 13일, 金濟俊供草, 조선 신학생들은 그 후 1836년 12월 3일에 후동을 떠나 중국으로 갔고, 이듬해 6월 7일에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에 도착하였다.
7) [한국천주교회사], 383-384면.
8) "최우정 바리시오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배티 사적지, 1996, 70-73면.
9) 같은 책, 80면.
10) 김진용, "金大建 신부 가족 피난지에 대한 연구 - 寒德洞을 중심으로 -", [교회와 역사], 218호와 219호, 1993.
11) [한국 천주교회사] 하, 18-19면.
12) 하성래, [성 김성우 안토니오와 구산의 순교자들], 천주교 구산교회, 1984; [경향잡지] 제21권 515호, 1927. 6.
13) 차기진, "조선 후기의 天主歌辭에 대한 재검토", [교회와 역사] 제272호, 1998. 1. 12면.
14) [한국 천주교회사] 중, 381. 388면.
15) 달레의 기록에 '상게'라 표기되어 있는 곳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곳은 '송교'임이 분명하다([한국천주교회사] 중, 424면).
16) 차기진, "박순집",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1997, 3134면.
17) 전동 성당 100년사 편찬 위원회,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 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동교회, 1996, 101. 126-132면.
 
[출처 : 차기진, 사목 233호(1998년 6월), pp.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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