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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1)  전례의 역사2)
장신호 신부 역

전례는 역사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맞추어 여러 형태의 복합체로 표현된다. (전례의 본성에 대해서 이미 제 1 장에서 살펴보았다). 전례는 "신적 제정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과 시대의 변천을 따라 변경할 수 있는... 혹은 변경하여야 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전례헌장 21). 우리는 바로 그 변화의 역사를,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립된 '전례의 신적 제정'에서부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회의 전례거행에 천천히 발생했던 수정, 변화,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역사의 주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현 시대의 전례거행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바탕이 된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대한 비평적 연구만이 앞으로의 변화를 이끌어갈 힘을 제공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전례의 '일반적인' 역사를 살펴본다. 여기서 제공되는 전망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들만 더욱 분명히 살펴보게 되며, 특히 서방전례에 한정될 것이다.
 
 
2.1. 출발의 시대
 
2.2.1. 사도전통에 따른 첫 전례
 
신약성서에서 사도전례의 체계적인 서술을 찾을 수는 없지만, 부가적인 설명을 요하는 몇몇 부분과 암시들을 발견할 수는 있다.
 
제 1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라는 용어가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전례를 가리키기 위해 단 한번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초세기 사도 공동체가 전례적 예배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그리스도교 전례의 '참신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교회는 유다이즘의 자취 위에 태어나 그 배경 속에서 걸음마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유다 예배에 동참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거기서 멀어져 갔다.3)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약성서와의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의 참신성에 대해 점점 더 자각하게 되었다. 고유의 특성에 대한 - 또한 전례의 영역에서도 - 이런 자의식의 확립은,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 이후에 최고조에 도달한다.
 
유다기원을 부정하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그것과 관련을 갖고, 사도교회는 새로운 예배 형태를 창조하니, 그리스도교 전례의 발전은 거기서 그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여기서 살펴보자.
 
신약성서가 공동체의 전례거행에 대해 말할 때 지속적으로 '모이다'와 '함께 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마태 18, 20; 1고린 11, 17.20.33-34; 14, 23.26; 사도 4, 31; 20, 7-8; 히브 10, 25; 야고 2, 2 등 참조).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뜻 깊은 요소이다.4)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는 처음부터 시간기도를 위해 대성전에 모였다. 그와 동시에, 특정한 집(=교회의 집domus ecclesiae, oikoi ekkles as)에서도 모였고, 그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었다"(사도 2, 46). 성서의 다른 부분에 비추어 볼 때 - 비록 대부분의 본문이 일상의 종교적 식사인지 혹은 성찬을 다루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할지라도 - '애찬(아가페 식사)' 혹은 '성찬'(1고린 11, 17-34 참조)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1세기에 특히 유다기원 공동체에서 성찬례는 일상의 식사와 함께 행하여졌다. '성찬', '애찬'과 함께 '사도들의 가르침', '형제적 친교' 그리고 '기도'가 있었다(사도 2, 42.47; 4, 24-31; 12, 5 참조). 이런 총체적 상황에서, 유다의 기도 형태들이 - 축복의 기도birkat ha-mazon나 어휘들: 알렐루야alleluia(묵시 19, 1-6 참조), 아멘amen(1고린 14, 16; 묵시 5, 14; 7, 12; 19, 4 등), 호산나osanna(로마 16, 27; 갈라 1, 5; 필레 4, 20; 1디모 1, 17 등) -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특히,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매주의 기념일로 지내는 '주일'의 전례적 모임은 곧 특별한 중요성을 가졌다(1고린 16, 2; 사도 20, 7; 묵시 1, 10 참조). 파스카의 연례적 거행은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 파스카 주일은 곧 연례적 파스카 기념일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러 성서 본문 중에 사도 바오로가 유다의 파스카 예식을 언급하는 고린토 전서에서 그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넘이절(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습니다"(1고린 5, 7).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유다의 파스카 양의 희생을 대체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확실히 드러나 있다.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집행한다(사도 2, 38).문맥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성령에 의한" 세례이며(마태 3, 11; 마르 1, 8; 루가 3, 16; 요한 1, 33 참조), 예수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요한 3, 3-5 참조).
 
요약하면, 사도공동체는 전례의 고정된 규정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이미 고유한 전례 형태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찬례와 세례와 기도를 위한 모임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전례형태 - 안수, 병자도유, 참회 등 - 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다.
 
이 시기에 전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본질적인 것은 네 가지 요소이다: 1.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 2.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3.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 4. 성령의 활동.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례적 봉사를 위한 모임과 세상에서의 봉사를 위한 모임을 서로 분리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거룩함(聖)'과 '세속(俗)'간의 경계를 초월하신 데 따른 영향이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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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II-III세기의 전례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 전례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저자들은 사도시대 교부들 - 디다케,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네의 폴리카르포 등 - 이다. 사도시대 교부들 중에 철학자인 유스티노 순교자의 증언은 중요하다. 그리고, 로마의 히폴리토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교회규정 -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으로 희랍제목에서 번역되는 215년경의 문서로 이것은 전통을 변질로부터 보전하려는 상당히 보수적인 노선을 따른다. - 에서 처음으로 몇몇 전례문을 찾아볼 수 있다. 히폴리토는, 전통적인 전례문을 소개하면서도, 숙련된 주교들에 의한 자유로운 기도문 작성의 권리(자율성)를 인정한다. 히폴리토를 이어 3세기 중엽에는, 세례, 성찬례 그리고 서품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라틴어 그리스도교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테르툴리아노와 치프리아노의 저작들이 아주 중요하다.
 
위에 언급된 저자들은 주교, 사제, 부제 서품식; 기도에 대한 규정; 성찬례; 그리스도교 입문성사; 주일; 연례적 파스카의 거행 등에 대해 동일한 소식을 전한다.
 
2-3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다 히브리-아람어권 세계로부터 희랍세계로, 시리아어(아람어)와 특히 희랍어와 라틴어를 통해 전해진다. 이 때는, 교회의 삶의 다른 부분에서와 동일하게 전례의 영역에서도 '창조성'과 '자발성improvvisazione'의 시대였다.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초세기 전례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또한 고유하게 보편적이었으니, 사도전통이 결정적으로 정경화 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발성'도 전통적 원칙과 규정을 -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불변의 요소 - 지키는데 충실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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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IV세기의 전환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313년)은 교회에 평화를 선물했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변세상을 향해, 또 로마제국을 향해 열리도록 하였기에, 특히 도시에서 쉽지만은 않은 개종을 발생시키고, 또 그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어느 정도 무관했던 이교의 제의요소들에 대한 불가피한 접촉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 영향은 전례의 영역에도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이 전례형태의 충만한 발전의 시작이다.
 
전례거행은, 특히 큰 도시들에서, 이제 황제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건설된 "바실리카"에서 거행되었고, 그것은 전례를 더욱 성대하게 하였다. 일반 가옥(교회의 집domus ecclesiae)에서 성전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성전은 "제단"을 필요로 했다. 이제 원하던 시기에 펴던 '밥상'이라는 개념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오히려 구약성서에서 언급되었고, 결코 잊혀지지 않은, 고정된 '제단'이라는 외형을 추구하게 되었다. 중요 성전 옆에는 "세례당"이 세워졌다.
 
황제의 뜻에 의해, 주교들은 제국의 고위관직에 준하게 되었다. 주교와 사제들에 대한 이런 사회적 평가는 또한 관료복장을 착용하도록 했고, 여기에서  전례복이 발전하게 된다. 5세기 이후 로마남성들은 옛 복식(긴옷)을 버리고 짧은 형태의 프랑스-독일 복식을 따라갔지만, 전례 직무자들은 옛 축제복장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후에 이것이 고유한 전례복식이 된다.5)
 
주일의 전례거행은 이제 국법에 의해 보호되었다. 4세기 후반에 부활시기와 성탄시기를 포함하는 전례주년의 최종 구조를 형성하였다.
 
콘스탄틴의 칙령에 의한 박해의 종결과 더불어 신앙의 증거자(순교자martiri)들은 특별한 관심과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순교자 공경은 이미 동방에서 비롯하였다. 예를 들어 약 2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스미르네의 공동체는 순교자 폴리카르포(+155 혹은 156)6) 주교에 대한 연례적 기념을 거행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순교자들의 무덤 옆 혹은 위에 세워지는 무덤성당memoria이 나타난다.
 
기도의 발전을 위해, 특히 일상의 시간기도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건은 4세기의 '수도생활monachesimo'의 성립이었다.
 
그 이후의 전례형성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콘스탄틴의 평화 이후 전례, 윤리, 신학적 측면에서 점점 증대된 중심지 교회의 영향이었다. 이것이 같은 언어, 같은 지역, 같은 문화를 가지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전례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고, 중소 도시 교회들은 중심지 교회의 모범과 실례를 따르게 된다. 큰 윤곽에 있어 단 하나의 사도적 토대에서 출발하여, 아주 넓은 자율성을 거쳐, 총주교좌 등 중심지의 모범을 따른 교회지역의 범위 안에서의 전례의 통일로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의 변천은, 그리스도교 전례가 "영적" 예배로 존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도, 몸담고 있는 주위환경의 문화, 사회,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전례가 고유의 특징을(혹은 특정한 국민성을) 취득하였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막지는 않더라도,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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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례의 분류
 
여러 전례의 형성은 로마제국의 우방국들 안에 (로마제국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원심력이 나타난 때와 상응하니; 디오클레찌아노(재임 284-305)황제가 더욱  유연한 통치를 위해 도입한 지방분화도, 콘스탄틴 황제가 비잔틴에 황제령을 설치하고, 로마제국을 네 개의 도(道)로 분할한 노력도, 이미 시작된 하강곡선을 멈출 수 없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로몰로 아구스톨로의 폐위와 함께 사라진다. 그후 서방에는 더 이상 황제도 제국도 없으며, 이론적으로 비잔틴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적인 독일권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들만 있을 뿐이었다.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은, 종교, 경제, 문화의 상황에 따라 각 교회지역으로 하여금 필요한 모든 실천규범disciplina을 재정비하도록 하였으니; 곧 여러 지방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미 5세기초에 총대주교좌는 소속 교회의 모든 생활 - 전례를 포함하여 - 의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법제화되었다. 그것은 같은 지역교회의 전례적 특성을 조절한 고유전례를 성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5세기 이전에, 어떤 주교가 다른 주교에게 전례문제를 지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2.1. 동방의 고유한 전례7)
 
서양사람들은 리뚜르지아liturgia와 리뚜스ritus를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하지만8), 좁은 의미로 말할 때, 리뚜스ritus는 제의적인 것뿐만 아니라 한 교회의 행정과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3-4세기 초반의 전례는 지형적 위치에 따라 둘로 분류할 수 있다: '시리아-안티오키아' 계통과 '알렉산드리아' 계통. 로마제국의 지방중심이요, 여러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은 특별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지 못해, 거의 모두를 - 전례를 포함하여 - 안티오키아로부터 전수 받는다. 이렇게 하여 5-6세기의 교회분열 이후 결정적인 전례분류들이 형성되는데, 더욱 중요한 전례들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2.2.1.1. 동 시리아 전례집단 혹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전례집단은 에페소 공의회(431)이후 네스토리오 주의에 동조한 교회들이다. 이들은 484년경 뫂수에스타의 테오도로의 신학을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약 8세기동안 서 시리아-그리스에 대해 폐쇄적인 교회정책을 편다. 이것이 이 전례집단이 초기 전례형태를 유지하는 이유이다. 네스토리오 교회의 원대한 선교활동은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인도 서남해안의 교회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2.2.1.2. 반 칼체도니아 전례집단은 칼체도니아 공의회(451)의 결정을 거부한 교회들이다. 서 시리아, 아르메니아, 곱트, 이집트 교회 등을 포함하기에 아주 복잡한 전례집단이다. 교의와 교계제도에서는 안티오키아의 영향이 발견되나, 전례에서는 비잔틴의 영향이 감지된다.
 
2.2.1.3. 칼체도니아 전례집단은 칼체도니아 공의회에 동조하는 칼체도니아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 소속 교회의 일부를 포함한다. 이 전례집단은 비잔틴 전례의 요소를 항상 더 받아들였다. 성화상논쟁 때, 팔레스틴의 수도환경의 전례가 잘 정돈된 비잔틴 전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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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서방전례들
 
4세기부터 서방전례에 대한 간접증언은 아주 많이 증가하나, 전례본문은 더 나중에 나타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례전통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2.2.2.1. 로마전례 - 로마전례의 고유하고 참된 본문은 상대적으로 늦게 전해져온다. 가장 오래된 본문은 [베로나 성사집sacramentarium veronese](6세기 후반)이며, 미사를 위한 기도문들을 적어놓은 소기도서libelli missarum들을 사회달력에 맞추어 정리했으나, 훼손이 심해 1월에서 3월까지의 부분(사순시기와 부활시기)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나서 7세기 말엽 파리 근교에서 필사된 [젤라시오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 vetus]이 있다. 이 성사집은 로마의 전례를 소개하며, 가장 오래된 기도문들은 6세기 로마 전례의 기풍을 간직하고 있다. 원본은 로마의 본당titulus의 전례에 도움을 주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최초의 참된 의미의 성사집이다. 이 성사집은 성탄 전야로부터 모든 전례 주년을 포함하고, '전례주년temporal'과 '성인축일sanctoral'을 분리하였으며, 또한 다양한 예식서를 포함하고 있다.9)
 
[그레고리오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은 그 제목 때문에 보통 그레고리오 대교황(재임 590-604)의 작품으로 간주하지만, 호노리오(재임 625-638)교황 때 편집된 것이며, 교황집전 전례를 드러낸다. 이 성사집에서는 '전례주년'과 '성인축일'이 서로 섞여 있으며, 몇몇 주일들은 바로 직전에 거행된 축일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10)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교황은 개정 표준판을 요청한 샤를르 대제11)에게 [그레고리오-하드리아노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 hadrianum]을 보낸다. 프랑스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 아니안의 베네딕토(+821)에 의해 마련된 부록, '후꾸스꿰Hucusque'가 덧붙여진다.
 
그리고 8세기와 그 이후에 다양한 형태의 혼합 성사집들이 무수히 나타나는데 이들은 [8세기 젤라시오 성사집]이라 불린다.12)
 
로마의 성사집들이 상대적으로 늦게 나타난 것에 비교할 때, 그 본문들 중 몇몇은 레오 1세(재임 440-461), 젤라시오 1세(재임 492-496), 비질리오(재임 537-555) 교황들에게까지 그 작성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로마 전례에서 사용하는 전례기도문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옛 전통들에서 취해진 것이다.
 
순수 로마 전례의 요소를 동방전례들이나 다른 서방전례들의 것과 비교해 보면, 로마 것의 정확하고, 절도 있고, 간결하고, 장황하지 않고, 덜 감성적인 단순성과; 거룩하고 동시에 인간적이고 영적이며 문학적인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신학의 특징적 요소 중에 강조할 것은, 기도들이 통상적으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 하느님께ad Patrem per Christum in Spiritum Santum'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감사기도canon romanus'는 그것이 유일한 양식으로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전례나 갈리아 전례 혹은 동방 전례의 여러 감사기도문들과는 구별된다.
 
2.2.2.2. 아프리카 전례 - "갈리아(프랑스) 전례와 스페인 전례는 동시에 형성되었고, 미사 구조에 있어 초기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북서 아프리카 전례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북서 아프리카 전례는 그리스어 사용기를 거쳐서 라틴어 사용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 전례를 그저 로마 전례의 한 부류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은, 로마는 다마소 교황(+384) 시대까지 희랍어를 사용한 반면, 아프리카는 이미 치프리아노(+258) 때부터 라틴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이 전례의 본문들은 유실되고 없다. 단지 3-4세기의 아프리카 교부들의 저작에서 간접증언만 발견될 뿐이다.13)
 
2.2.2.3. 갈리아(프랑스) 전례 - 갈리아 전례에 대해, 아를르Arles의 체사리오Cesario 성인(+542)과 뚜르Tours의 그레고리오(+594)의 강론집에 포함된 몇몇 정보들을 발견할 수 있다. 6-7세기의 순수 갈리아 전례를 증언하는 고유하고 참된 문서들은 모두 조각들이다. 이 전례는 프랑스 지방에서 거행된 것으로, 통일성을 부여할 뛰어난 중심교회가 없는 탓에 아주 많은 지방색을 가지고 있다.
 
갈리아 전례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로마 전례의 절제와 단순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기도문들의 종류가 많아졌고, 문체는 장엄하고 화려한 색조를 풍기며 때로는 장황하고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기도는 자주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를 향한다; 예식들은 항상 더 많은 요소를 포함한다. 성찬례에 관해 살펴볼 때, 성찬제정문 바로 앞 뒤 부분을 포함하여 매일 매일 바뀌는 기도문으로 구성된 감사기도의 구조는 특징적이다. 그것은, 감사기도의 전체적 윤곽 속에 전례주년의 주제와 고유의 전통적인 주제 사이의 혼합을 이루게 한다. 이것으로 갈리아 전례는, 고정된 양식의 감사기도를 가진 로마, 암브로시오 전례와 구분된다. 스페인 전례는 갈리아 전례와 더 유사하고, 오히려 더 발전되고 완성된 부분도 있다. 자신의 영토에 로마 전례를 공식적으로 도입키로 한 샤를르 대제의 결정으로, 9세기 초 갈리아 전례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14)
 
2.2.2.4. 스페인 전례 (모자라비 전례) - 이 전례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통일기인 6세기에 나타난 전례이며, 그레고리오 7세(재임 1073-1085)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거행되었다. 몇 년 후 톨레도Toledo를 아랍세력으로부터 탈환하였을 때(1085), 아랍인들의 통치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들(=모자라비mozarabi)을 위해 이 도시의 6개 본당에서 옛 스페인 전례를 계속해서 사용하도록 허락되었다.
 
스페인 전례의 형성과 발전은, 1. 한편으로 스페인 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의 교리적 문학적 작품연대와 함께 한다: 우르젤의 유스티노(6세기 초반), 레이다의 요한(7세기 중엽), 레안드로(+600), 그의 동생인 세비야의 이시도로(+636), 그리고 톨레도의 힐데폰소(+667) 등; 2. 다른 한편, 무수한 스페인 공의회의 법제화 덕분이다. 특히, 비시고틱 시대(540-681)에만 공의회가 24회 개최되었다.
 
스페인 전례의 특징은 갈리아 전례의 특징과 아주 유사하다. 고유한 내용을 살펴볼 때, 스페인 전례의 기도문에서 삼위일체와 강생의 신비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핵심을 명백히 하려는 교의적 염려를 찾아볼 수 있다.15)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82년 스페인 전례의 예식서들을 개정하기 위한 전문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8년 새로운 [스페인 미사경본Missale hispano-mozarabicum]은 경신성사성으로부터 'ad interim'인준을 받았다.16)
 
2.2.2.5. 암브로시오 전례 - 이 전례는 밀라노라는 중요한 지역교회(교구)의 생생한 전례로 존재하기를 그쳐본 적이 없기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 전례가 그저 단순하게sic et simpliciter 암브로시오Ambrogio(+397) 성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그의 이름에 따라 명명되었다. 암브로시오 전례의 필사본들은 - 미사 기도문이나 전례력이나 - 이미 로마 전례의 영향을 많이 받은 9세기 이후의 것들만 전해져 온다. 그러므로 이 문서들은 부분적으로만 암브로시오 전례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방과 갈리아 전례와의 접촉을 드러내는 요소도 있다.
 
암브로시오 미사의 구조는 로마 미사의 구조와 아주 유사하다. 몇몇 저자들은 아프리카-갈리아-스페인 전례와의 접촉점이 되는 더욱 초기의 공통구조를 재구성해볼 수 있는 요소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17)
 
1970년 암브로시오 전례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맡은 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른 전례개혁의 첫째가 되었다. 1976년에 [미사경본Messale ambrosiano secondo il rito della santa Chiesa di Milano]이, 그리고 1981년에 [시간전례서Diurna laus. Salterio a uso delle comunit  di rito ambrosiano]가 발간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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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중세의 서방전례
 
중세 서방 전례의 발전은, 독창적인 창작보다는 적응이나 복제에 불과했다. 창조성은 오히려 전례행위의 주변에서 나타났다: 신심행위, 부속가, 신자들과 또한 전례집전자를 위한 사적기도 등. 전례의 다수성은  16세기 트렌토 공의회에 의해 성립될 단일성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2.3.1. 프랑크-카롤링 시대
 
7세기와 8세기 전반에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의 혼합이 이루어 졌으니, 이때가 바로 전환기이다. 로마 전례에 대한 일반적인 호감과, 많은 주교와 수도원장의 갈리아 전례에 대한 불만(지나치게 다양한 형태), 널리 퍼진 부정확함 등이 원인이었다. 영국출신 보니파시오(+755) 주교는 프랑크 지역 백성을 로마전례에 합치시키려 했고, 그의 친구인 멭츠의 크로데강고(+766) 주교도 같은 생각을 가졌다. 이런 의도는 정치권의 노력을 방향 지웠다. 뻬삔 왕은 754년 자기 왕국에 로마 전례를 의무화하였고, 그런 노력은 785-786에 샤를르 대제에 의해 완성에 도달한다.19)
 
그러나 사실상 로마 전례라고 생각하고 도입한 것은 이미 갈리아적 요소가 섞인 것들이었고, 그 후에도 갈리아적 적응과 변형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 정비된 전례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여러 가지 요소들의 발전; 풍부하고 다양한 기도문들; 새로운 양식(더 길고, 좀 더 장황하고, 극적인 표현들). 성찬의 전례에 대한 우의적allegorica 설명은 그 이해를 결정하였다. 이런 우의주의allegorismo의 대표적 인물은 분도회원인 알퀸Alcuin(+804)과 그의 제자요 샤를르 대제의 주요고문인 멭츠의 주교  아말라리오Amalario(+814)였다. 우의주의는 전례적 상징과 표징의 의미를 이상하고 환상에 찬 성서적 접근을 통해 설명해보려고 시도함으로써, 전례예절들을 한낱 대중적인 구경거리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만다.
 
샤를르 제국의 붕괴는 경제적 영향을 끼쳐 전통적 경제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도feudalismo라는 새로운 경제상황은 또한 전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9세기의 전례-신심적인 개인주의의 전반적인 배경이 된다. 신심주의devozionalismo는 전례의 대용으로 자리잡는데, 그것은 강한 종교적 심성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여 제의적 표현과 신심행위를 단 하나의 공간으로 마련하려고 노력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심을 왜곡하고 또한 시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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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로마의 몰락과 독일의 영향
 
로마교회는 카롤링 제국의 붕괴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로마는 교회법적 활동을 계속했지만 지도력이 약해져, 거의 어떤 교회도 무엇을 조절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더 이상 로마에 문의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독일 문화권이 탄생하고 성장하였다. 제국의 붕괴로 독일은 옛 서양문명의 모든 유산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오토Otto 1세(+973)가 권좌들 차지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 옛 카롤링 제국 체제의 개혁자로 자처했지만, 실은 보수주의자였다. 영적 분야에 있어서 그의 아내 아델라이드Adelaide가 적절하게 도와주었다. 우리는 전례분야에 미친 이들의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성사집들은 전례의 순서에 대한 설명 없이, 대체로 전례 거행에 필요한 기도문들만 수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식서들]ordines은 고유하고 참된 의미의 예식서이며, 대다수는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형성되었다.
 
서방전례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약 950년경 마인쯔Mainz의 성 알바노Albano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나중에 [로마-독일 주교예식서Pontificale romanum-germanicum]라 불리는 것으로, 소위 [옛 로마 예식서Ordo romanus antiquus]에 갈리아식 본문들이 첨가되어있다. 10세기 후반(정확하게 오토 1세가 황제대관을 위해 로마에 간 962년)에 이 전례서는, 교회적 문화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에 있던 로마에 되돌아온다. 로마는 9-10세기 초 간신히 필사본들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순수 로마 전례일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신속히 받아들여졌다. 동일한 사건이 (가져온) 다른 필사본들에게도 일어난다. 순수 라틴 양식으로 로마를 출발한 전례서들은, 갈리아와 독일에서 손질되고, 변해서 돌아왔지만, 결국 로마의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옛 로마 전례는 갈리아-독일식 옷을 입고 로마에 돌아오고, 여기부터 '교황청 전례'라는 서방의 통일된 전례를 향한 걸음이 시작된다.
 
9-11세기 동안 크게 번진 '성체성사논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카롤링 시대와 그 이후, '상징'과 '실재'는 마치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상징은 지시해주는 사물로 생각하여, 구별되는 다른 것을 향한 주의를 끌게 하는 사물로 생각하였고; 실재는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물리적 실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체성사논쟁의 저변에 깔린 배경이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이 시대의 성찬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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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그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7세(재임 1073-1085) 교황과 함께, 교회생활 뿐만 아니라 전례에 대한 쇄신이 로마에서 시작된다.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시작된 개혁은 그 바탕에 성직계를 개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배경이 전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설명한다. (그러나 전례를 사제직에 한정된 고유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전례는 사실 그 집전자에게 성성(거룩함), 생활의 충실성, 품위를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직계의 잃어버린 품위를 다시 확립하도록 하였다.
 
교황권위에 대한 강한 자의식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그레고리오 개혁은  로마 주변의 모든 교회의 실질적인 일치를 보장할 목적으로 중앙집중화의 과정을 밟는다. 이런 배경에서 스페인 전례의 폐지, 성인 교황들의 축일을 모든 교회에서 거행토록 한 결정, 주교서품식에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의 도입 등이 진행된다.
 
그레고리오 개혁에 따른 전례서 개정을 이끈 원칙인 '복고'는, 역사적 실제 상황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로마, 갈리아, 독일 전례의 근본구조를 받아들이고 체계화하는데 그친다.
 
이 모든 개혁의 교회론적 배경은 교계적이고 동시에 교회법적이다. 평신도들은 강하게 성직화된 전례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전례에서 성직자들이 차지하는 우위를 감소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그 이해를 도우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사제직에 대한 평판을 높이고; 전례 행위 앞에서 신비에 대한 감각을 계발하고; 신심행위(비록 전례의 옷을 입었지만)에 자리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라틴교회의 개혁은, 일찍이 샤를르 대제가 자신의 제국을 위해 실현했던 전례적 일치를, 교회론적 원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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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보편전례를 향하여
 
그레고리오 7세가 애호한 '서방전례의 일치'라는 이상은 세월이 지나면서도 다른 교황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2.3.4.1. 혼합 혹은 총합 전례서 - 그레고리오 7세의 후계자들은, 라테란 대성전의 전례로부터 독립한 교황전용 경당(소성당)의 전례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후의 개혁은 교황청 소성당의 전례라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의 전례적 업적은 무엇보다도 전례서의 개정에 치중되어있다. 원래 성찬례나 시간전례에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각자가 맡은 부분에 대한 전례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줄어들어 모든 것을 사제가 맡게 되었고, 그 결과 사제의 비중은 점점 더 커져갔다. 사제는 이제 실질적으로 유일한 행위자가 되었고 평신도들은 더욱 수동적으로 참례하게 되었다. 이 때, 미사의 다른 부분 - 독서(처음에는 독서집lectionarium), 응송(처음에는 응송집antiphonale) - 들도 (기도문들을 모아놓은) 성사집sacramentarium 안에서 찾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과정의 마지막 결과는 13세기의 '총미사경본missale plenarium'이다. 사제 개인이 드리는 미사를 위해 아주 유용하게 준비된 이 책은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13세기의 소위 [교황청 관례에 따른 미사경본missale secundum consuetudinem curiae romanae]인데, 작은 형제들(프란치스꼬회)이 받아들여 그들의 선교여행에 항상 지참하고 다니는 덕에 곧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20)
 
미사경본이 탄생한 것과 같은 과정이 교회의 기도를 위한 전례서에도 똑같이 발생한다. 편의를 위해, 개인적인 시간기도를 위해 등의 이유로, 시간전례를 바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담아 아주 작은 한 권의 전례서로 편찬하였는데, 이는 '소성무일도breviarium'라 불리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마 교황청 관례에 따른 소성무일도Breviarium secundum consuetudinem romanae curiae]이며, 1223년 공식적으로 이 성무일도를 받아들인 작은 형제들(프란치스꼬회) 덕분에 곧 널리 전파되었다.21)
 
2.3.4.2. 중세 말기의 전례생활 - 프랑스 비엔느Vienne 공의회(1311-1312)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사이의 시기에 전례 생활과 영성이 아주 많이 쇠약해지는 현상이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교황의 아비뇽 천도와 서구 교회에 대립교황이 생기는 최악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성직계와 신자들 사이에도 분열이 생기는 데 - 몇몇은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성직계는 세속화되고, 신자들은 대중 신심을 불태우는데 전념하게 된다.
 
이 시기 신심은 감정의 강렬함, 내적 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 열정의 극대화 등을 대체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성체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등, 감각적으로 경험하려는 경향; 객관적 가치보다 잘못 이해된 것이라도 주관적 차원에 대한 강조; 예술은 복잡해지고; 대중 신심과 전례에서는 반복함으로 (예를 들어 미사를 반복해서 참례하는 등) 만족하려는 경향 등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 신심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는데, 더욱 친밀한 느낌에 의한 더욱 실재적인 신심으로, 예수의 삶의 더욱 인간적이고,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같은 상황이 마리아 신심의 영역에서도, 또 일반적으로 모든 성인 공경에서 발생한다. 주목할 것은, 13세기와 그 이후 대중 신심은 전례적인 신심과 비교해 볼 때 항상 더 자율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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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트렌트 공의회와 전례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부 - 평범한 사제들, 수사들, 신자들 - 로부터 영적 개혁의 소망이 나타난 것인데, 반면에 고위 성직계는 영적으로 부족하거나 나빠졌고, 더 고위층은 전통 종교심과 인문주의에 따른 삶의 개념을 혼합하고 있었다.
 
2.4.1. 근대 신심devotio moderna
 
이런 배경에서, 14세기 말 네덜란드의 그루트Groote(+1384)가 주도하고 곧 서유럽에 퍼져나간 근대 신심운동을 보아야 한다. 근대 신심의 특징은 고행의 실천, 체계적인 기도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묵상 등이다. 이 영성의 고전적 작품은 켐피스Kempis의 토마스(+1471)가 지은 [준주성범Imitatio Christi]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건전한 영적 혁신이었으나, 전례의 테두리 밖에 머물고 만다.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신심에서 - 주변적인 영역이지만 - 그들의 영성생활을 위한 영양분을 탐색하고 발견한다.
 
2.4.2. 트렌트 공의회의 전례 개혁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교회의 "머리와 지체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열망이 16세기 초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근본적인 변화의 주장과 엄중한 고발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광범위한 동의와 협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신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전례거행의 측면에서도 로마전례를 부정하고 고발하였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마침내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여러 번 중단되었음)를 개최하게 되었다. 공의회는 우선 프로텐스탄트 개혁자들로부터 제기된 보다 시급한 교회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고; 마지막 회기가 되어서야 겨우 전례개혁을 다루기 시작했다.22) 관련 위원회의 작업이 끝난 후, 공의회는 제 22회기에서(1562년 9월 17일) 교의 교령 "미사의 거룩한 희생에 대한 교의와 신조"와 두 개의 규율 교령을 발표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미사 거행에 있어서 준수할 것과 피할 것에 대한 교령"이다.23)
 
교의 교령decretum dogmaticum은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과 산 이와 죽은 이을 위한 미사의 속죄 효과에 대해 정의한다. 또한, 사제 홀로 영성체를 하는 미사, 백성이 참석하지 않는 미사, 그리고 성인들을 기념하는 미사의 합법성을 선언한다. 끝으로 미사기도문의 무류성(오류에 빠지지 않는 자유로움)을 선언한다.
 
규율 교령decretum disciplinare은 보다 드러난 잘못과 남용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불경스럽거나 전례를 방해하는 모든 태도를 단죄하는 이외에, 천박하거나 선정적인 모든 종류의 노래와 음악을 성당 안에서 금지하였고; 사제가 임의로 미사의 예절과 기도문을 선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미신적 색채를 풍기는 미사의 "숫자적" 참례는 단죄되었다. 끝으로 주교들은 전례의 질서를 확립할 의무와, 특히 미사예물에 대한 남용을 막을 의무를 지게 되었다.
 
전례서의 개정은24) 오랜 작업과 민감한 결정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공의회가 그것을 달성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준수할 원칙과 기준들을 제시하면서 그 개정의 임무를 교황에게 위임하였다. 개혁은 몇몇 전례서에 한정할 이유가 없었기에 전례의 모든 영역에 보편적으로 확대되었다. 개혁은 또한 몇몇 나라에 한정될 의무가 없었기에 모든 서방에 유효한 표준이어야 했다. 이런 기준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소망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특히 프랑스는 자신들의 부흥기에 고유한 내부 규정을 갖기를 원하였다.
 
전례는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의심이 가는 후대의 첨가를 제거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고, 또한 전통의 흐름에 따라가야 했으며, 끝으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비판과 개정에 의해 전례에 야기된 혼란한 상태를 평정하여야 했다. 성인 축일과 기원 미사의 수를 줄여, 미사와 시간전례의 우선권을 전례주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 또한 미사통상문을 고정시키고,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 지침도 만들어야 했다.
 
공의회의 이러한 결정은 곧 실행되었다. 비오 5세 때인, 1568년에 [로마 소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가 발간되고, 1570년에 [로마 미사경본Missale romanum]이 발간되었다. 이어서 다른 전례서들도 발행되었다. 이들을 소개하는 교황칙서는, 200년이상 경과한 고유의 관습을 가진 교구나 수도회를 제외한, 모두에게 이 전례서들을 사용할 것을 의무로 규정하였다. 1587년 식스토 5세 교황에 의해 설립된 '전례성Congregatio riti'은 신자들의 전례규정 준수를 지도, 감독하였다.
 
트렌트 개혁의 몇몇 "폐쇄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태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 올바른 개혁을 제시했다: 라틴어가 아닌 토속어에 의한 예절; 두 가지 형상에 의한 영성체; 미사 안에서 거행되는 영성체; 미사의 거행에 존재하는 지나치게 사적요소의 제거; 특히, 남용의 제거 등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교회전통의 고유한 유산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결국,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내적 태도에 대한 논쟁 속에 많은 것들을 (몇몇 올바른 것들도 함께) 거부한다.
 
트렌트의 개혁업적은 무엇보다도 15세기의 위기로부터 전례를 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한정된 작업이었다: 당대의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례를 고정시켰지만, 전례를 실생활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 갈증을 대중적 신심의 형태로 해소하게 만들었으며, 이렇게 해서 의식하지 못한 채 바로크 시대의 종교문화의 기원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 성사의 상징들에 대한 어떠한 재평가 작업도 없이 최소한의 합법성을 선언하여, 예를 들어, 축성된 빵으로만 이루어지는 영성체, 단순히 "유효성"만 추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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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바로크 시대의 전례
 
바로크는 17세기의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난 풍미와 양식인데, 기이하고, 관습에서 벗어나고, 과장되고, 장식적인 경향을 가진다. 이것은 트렌트 공의회와 그것에 충실한 실천가들, 즉 당대의 위대한 교황과 주교들에 의해 개선된 그리스도교 정신 속에 성장한 것이다. 교회의 신앙을 구했고, 진리 안에 머물러 있음에 대한 자각의 표현이어서, 승리와 성취의 감격이 엿보인다. 바로크 문화는 근본적으로 축제 분위기이다.
 
삶의 바로크적 의미는 교회의 공식 전례를 항상 더 거창하게 하였다. 미사는 '눈과 귀를 위한 만찬'처럼 여겨졌다. 전례는 신자들이 관람하는 공연 - 위대한 왕의 궁전에서의 공연 - 처럼 여겨졌다. 이미 아빌라의 테레사(+1582)는 하느님을 '전하'라 부르곤 하였다. 이 화려한 형태는 특히 '주의 성체 성혈 대축일Corpus Domini'의 행렬, 수많은 간구, 순례, 성화에서 나타나다. 개인주의를 중세와 비교해 살펴보면, 지나친 남용들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미사 중에도 신자들은 묵주기도나 수많은 기도서들에서 발견되는 신심기도들을 바치곤 하였다. 신자들에게 미사통상문을 돌려주려고 불어로 번역했던 프랑스의 사제 부와셍Voisin의 시도는 알렉산드로 7세(1655-1667)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단죄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사건 중에 긍정적으로 기록할 것은 전례학의 발전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특히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전례원전들과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또한, 17세기의 프랑스 영성에는 전례로부터 영감 받은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베륄르의 베드로(+1629)의 영성에서는 -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교부들을 연구하였는데 - 강한 '하느님 중심주의Teocentrismo'를 발견한다: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로."25)
 
17세기 후반의 유럽적 양심에는 계몽주의를 향해 개방되는 위기의 운명이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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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계몽주의
 
계몽주의illuminismo는 18세기에 유럽에 나타난 철학적 문화 운동인데, 인간적 경험의 모든 가능한 영역에 이성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미신, 선입견, 무지를 타파할 것을 제안한다.
 
이 문화의 영향 아래 전례는 사목을 위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파악되었고,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며, 단순성과 합리성에 더욱 도달할 것을 도모한다. 바로크 문화에 반대하여, 전례의 본질적 논리를 향한 길을 찾는다. 사효성opus operatum의 잘못되고 지나친 적용에 반대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의 인효성opus operantis의 참된 가치를 밝히려 한다.
 
이런 배경 속에 전례 개혁의 몇몇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에는 로마의 인준을 받지 않은 프랑스 지방 전례liturgia neo-gallicana들이 나타난다. 피스토이아의 시노드(=대의원회의, 1786)와 같은 전례개혁의 다른 시도들은, 교의적 단죄에 의해 소멸되었다. 1780년부터 피스토이아와 프라토의 주교였던 시피오네 릿치Scipione Ricci에 이해 주도된 이 시노드는 긍정적인 면들이 없지 않지만; 이들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들이 아끼는 전통에 깊이 연관된 신자들에 대해서나, 돌발적이고, 정돈되지 못하고, 부적절하고, 무례하게 처신하였으며; 특히 전례의 개혁을 위한 적절한 준비가 심리적으로도 교의적으로도 되어 있지 않았다.26) 이들과 다른이들의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의 약간은 이단적이 경향과 지나친 이성주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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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전례와 19세기의 가톨릭 부흥
 
19세기 초,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마치 추의 왕복운동처럼 낭만주의Romantismo가 나타난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옹호하고, 감수성과 환상으로부터 영감 받은 개인주의와 역사적, 전통적 예배에 근거한 감성을 옹호한다. 보다 많은 경우에 낭만주의는 전례를 마치 역사적 논거로 혹은 미적으로 마음에 드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례의 본질은 이 사조와 완전히 별개였다. 낭만주의는 그 자체로 가톨릭적인 운동이 아니었고; 비록 몇몇 낭만주의자들이 나중의 가톨릭 부흥에 동참했고, 가톨릭 부흥에서 낭만주의적 요소들을 가끔씩 발견하기는 하지만, 이것과 후대의 가톨릭 부흥은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개념으로, 가톨릭 부흥이란 계몽주의 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중세 초기와 또한 로마와 긴밀한 결합을 추구한다. 이런 태도는 전례에 대한 관계를 또한 특징 지우는데, 존경해야 마땅할 가치가 있는 로마전례의 원형을 발굴하고 계발하기를 원하고, 전례를 통해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이 태도의 특출한 대표자는 베네딕토회 솔렘Solesmes 수도원의 창립자요 원장인 프로스페 게랑제Prosper Gu ranger이다. 게랑제의 근본적인 직감은, 전례를 교회의 기도로 표현한 그의 작품 [전례주년L Ann e liturgique]에 나타난다. 사실 전례는 모든 학파의 이론이나 방법론들을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기도의 진정한 모범이다.
 
이 가톨릭 부흥기에 후대의 전례쇄신을 위해 중요한 것은 전례의 역사에 대한 학문적 활동이다. 교부들과 원전들에 대한 저작들이 광범위하게 출판된다: 미녜Migne는 라틴 교부문헌들과 희랍 교부문헌들에 손댔고, 빠르게 출판하였다. 이 때, 가톨릭 부흥의 단계에서 보통 일방적으로 찬양된 중세-트렌트의 전례에 대한 더욱 비평적인 사고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또한 주목하여야 할 것은 20세기초의 기념비적 출판인 [그리스도교 전례와 고고학 사전Dictionnaire d arch ologie chr tienne et de liturgie]이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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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20세기의 전례운동28)
 
21세기의 전례운동은 자율적이었고, 교계제도의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통제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전례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내부적으로 교황들의 업적과 신학자와 사목자들의 활동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비오 10세의 자의교서 [시급한 일들 중에서Tre le sollecitudini](1903년 11월 22일)는 "교회가 거행하는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대한, 그리고 성사거행에 대한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다. 이 교서가 바로 사목적 단계에 있어서 전례운동의 진정한 시작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인 람베르트 보두엥Lambert Beaudouin(+1960)은 이를 자신의 전례적, 사목적 활동의 화두로 삼는다. 말리네에서 열린 벨기에 가톨릭 기관들의 연석회의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전례운동이 수도자들의 범위를 넘어, 훨씬 더 넓은 지평을 향해 열린 순간이라고 여긴다. 이 모임에서 보두엥은 전례가 가톨릭 교의의 기초적인 교리를 확립하고, 영성 생활을 자극하고 양육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례운동은 독일에 전파되었다. 전례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증진시킨 것은 특히 마리아 라흐Maria Laach의 수도원이었다: 오도 카젤Odo Casel(+1948)이 두드러진다. 그는 교부학과 종교학 연구를 통해, "전례는, '근원적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구원업적과 함께 마치 구원의 운반자처럼 현존하게 되는 신비들의 거행"이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마리아 라흐의 수도자들이 신학자와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1968)는 '전례정신'을 젊은이들에게 확산시켰고, 피우스 파르쉬Pius Parsch(+1954)는 오스트리아에서 본당차원의 대중적인 전례운동을 진행하였다.
 
전례운동의 순탄한 항로는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킨 의심과 반대들에 부딪힌다. 이런 논쟁 속에서, 비오 12세의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는 전례운동의 노력을 인정하고 몇몇 개념을 정확히 하는 등 전례적 요구에 대응한 결정적인 문서였다. 또한 교황은 전례의 부분적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요한 23세에 의하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야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위로
 
 
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24-51 의 번역이다.
2) T. Klauser, La liturgia nella chiesa occidentale, Ldc, Torino-Leumann 1971;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Edizioni Liturgiche, Roma 1977;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Marietti, Casale Monteferrato 1978; E. Cattaneo, Il culto cristiano in Occidente, Note storiche, Edizioni Liturgiche, Roma 19842;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in: NDL, pp. 1450-1478; X. Basurko - J. A. Goenaga, La vida lit rgico-sacramental de la iglesia en su evoluci n hist rica, in: Aa.vv., La celebraci n en la iglesia, a cura di D. Borobio, vol, 1, S gueme, Salamanca 1985, pp. 49-203; I. H. Dalmais - P. M Gy - P. Jounel, Storia della liturgia: riti e famiglie liturgiche, in: Aa.vv., La chiesa in preghiera. Introduzione alla liturgia, a cura di A. G. Martimort, vol. 1, Queriniana, Brescia 1987, pp. 37-103; A. Adam, Corso di liturgia, Queriniana, Brescia 1988, pp. 20-59.
3) 유대 예배와 그리스도교 예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보려면, Ch. Perrot, Il culto della Chiesa primitiva, in: Concilium, 19(1983), pp. 183-194. 보다 넓은 안목에서 살펴보기를 원한다면 다음 책을 보라: D. Syme Russell, Dal prima giudaismo alla chiesa delle origini, Paideia, Brescia 1991.
4) F. Hahn, Il servizio liturgico nel cristianesimo primitivo, pp. 40-41 참조.
5) P. Salmon,  tude sur les insignes du pontife dans le rite romain. Histoire et liturgie, Officium Libri Catholici, Roma 1955.
6) Il martirio di Policarpo, 18, in: I Padri Apostolici, 위의 책, p. 170. 참조.
7) 보다 광범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T. Federici, Le liturgie dell area orientale,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110-128; D. Gelsi, Orientali. Liturgie, in: NDL, pp. 983-1007.
8) 역주. 두 단어 모두 통상적으로 '전례'로 번역되었고, 리뚜스ritus는 몇몇 경우에 '예배, 예절'로 번역되었다.
9) [성사집]은, 카롤링 왕조와 그 이후에까지, 주교나 사제가 미사 혹은 다른 전례를 집전할 때에 필요한 모든 기도문들을 찾아볼 수 있는 전례서이다.
10) 역주. 예를 들어, 사도축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6월 29일) 후 1, 2, 3... 주일, 성 라우렌시오 축일(8월 10일) 후 1, 2, 3... 주일, 천사축일(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9월 29일) 후 1, 2, 3... 주일 등.
11) 역주. 여기에서 발음상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마다 공부한 언어권에 따라 인명과 지명의 발음이 달라진다. '샤를르' 대제의 이름은 언어권별로 '챨스', '까를로'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2) 로마 전례의 성사집과 다른 전례서들 그리고 그 편집들에 대해서 다음 책을 보라: I. Scicolone, Libri liturgici, in: NDL, pp. 701-713; 역주. 최근의 다음 연구들도 또한 참고하여야 한다: C. Vogel, Medieval liturgy - An introduction to the sources, The Pastoral Press, Washington, D.C. 1986; C. Folsom, I libri liturgici romani, in: direzine di A. J. Chupungco, Scientia liturgica - Manuale di liturgia, Pm, 1998, pp. 263-330.
13) F. Cabrol, Afrique (Liturgie ant nic enne de l ), in: DACL 1, pp. 501-619; 같은 저자, Afrique (Liturgie post-nic enne de l ), in: 같은 책, pp. 620-657 참조.
14)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책들을 참조하라: J. Pinell, La liturgia gallican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62-67; 같은 저자, Libri liturgici gallicani, in: 같은 책, pp. 185-190.
15)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J. Pinell, La liturgia ispanic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70-88; 같은 저자, Libri liturgici ispanici, in: 같은 책, pp. 190-201.
16) 교령은 Notitiae, 24(1988), pp. 671-672 참조.
17) 암브로시오 전례에 대해서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A. M. Triacca, Ambrosiana, Liturgia, in: NDL, pp. 16-52; A. Paredi, Storia del rito ambrosiano, Edizioni O.R., Milano 1990.
18) F. Dell Oro, Il nuovo Messale della chiesa ambrosiana, in: RL, 64(1977), pp. 524-623; 같은 저자, La "Diurna laus" ambrosiana, in: RL 70(1983), pp. 223-256 참조.
19)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 사이의 관계와 교환에 대해서는: C. Vogel, Les  changes liturgiques entre Rome et les pays francs jusqu   l  poque de Charlemagne, in: Settimane di studio del Centro italiano di studi sull Alto Medioevo, vol. 7, Spoleto 1960, pp. 185-295.
20) M. Andrieu, Missale curiae romanae seu Ordo missalis secundum consuetudinem romanae curiae du XIIIe si cle, in: Miscellanea F. Ehrle, 2, Roma 1924, pp. 348-376.
21)  P. Salmon, L office divin au moyen  ge. Histoire de la formation du br viaire du IXe au XVIe si cle, Cerf, Paris 1967 참조.
22) 트렌트 공의회의 전례개혁에 대해서, 다음의 책에서 그 주요 내용을 뽑아 요약하였다: G. Colombo, Introduzione allo studio della liturgia, Ldc, Torino-Leumann 1988.
23) 본문을 보려면: COeD, 732-741.
24) H. Jedin, Il concilio di Trento e la riforma dei libri liturgici, in: 같은 저자, Chiesa della fede, chiesa della storia, Morcelliana, Brescia 1972, pp. 391-425.
25) 참고: J. Aumann, Sommario di storia della spiritualit , Dehoniane, Napoli 1986, pp. 325ss.
26) 참고: R. Pilkington, La liturgia nel Sinodo Ricciano di Pistoia, in EL 43(1929), pp. 410-424.
27) 19세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참고: O. Rousseau, Storia del movimento liturgico. Lineamenti storici dagli inizi del sec. XIX fino ad oggi, Edizioni Paoline, Roma 1961. 부록에 있는 다음의 글들도 함께 참고하라: S. Marsili, Storia del movimento liturgico italiano dalle origini all Enciclica "Mediator Dei"; E. Moneta Caglio, Movimento liturgico ambrosiano.
28) 참고: B. Neunheuser, Movimento liturgico, in: NDL, pp. 904-918; F. Brovelli (a cura di), Liturgia: temi e autori. Saggio di studio sul movimento liturgico, Edizioni Liturgiche, Roma 1990.
 
[출처 :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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