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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우뚝 선 신앙이

이곳은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 부부 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이곳에서 유항검과 유관검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헝, 김유산, 이우집 등이 교수형을 당했다.
 
전주 중앙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이었던 전동 성당은 초대 주임은 보두네(Francois Xavier Baudounet, 1859-1915년) 신부가 1907년에 착공해 1914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고 벽돌은 당시 공사를 담당한 중국인 기술자들이 직접 구워 낸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국가 지정 기념물 제288호로 지정돼 있는 전동 성당은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유항검과 동정 부부 기념상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기념 동상도 볼 수 있다.
 
성당측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해 순교자 정원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치명 생수'가 솟아 성당 주위에서 식사도 할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전동 성당과 한국 최초의 순교자

전주시에 자리잡고 있는 전동 성당은 세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박해 후 전주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보두네 신부가 1889년부터 대승리(완주군 소양면)를 중심으로 사목을 하다가 1891년에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옴으로써 '전주 본당'(지금의 전동 본당)이 시작된 곳이다. 다음으로 이 자리에는 1914년에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식 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이 성당은 1981년에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면서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 터가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대승리에는 '전동 본당 발상지'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는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물론 이보다 앞서 1785년의 명례방 사건으로 이벽(요한)이 집안의 박해를 받은 후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김범우(토마스)가 형조의 아전들에게 체포되어 유배를 당한 뒤 배소에서 사망하였지만, 자료 부족으로 아직까지는 이들의 순교를 증명할 수가 없다. 특히 윤지충과 권상연은 초기의 신자로서는 드물게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뒤 혈세(血洗)를 받았으니, 전주교구에서 이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윤지충은 진산 장고치(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나 막현리(현 진산면 막현리)로 이주해 살던 남인 계열의 유명한 집안 출신으로, 조선 시대의 국문학 대가로 알려진 윤선도가 바로 그의 6대 조부이다. 그리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이종 사촌으로 공주 탄방(현 대전시 탄방동)에 살다가 막현리로 이주해 온 집안 출신이었으며, 경기도 양근의 유명한 신자였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형제는 윤지충의 고종 사촌 형이었다. 윤지충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정씨 형제들과의 학문 교류 덕택이었고, 권상연이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윤지충 덕택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87-1788년 무렵에 세례를 받은 후 그 동안 배워 오던 학문 대신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상 제사 금지령을 하달하자 신주를 폐하였고, 다음해 윤지충의 모친(권상연의 고모)이 선종하였을 때는 전통 상례(喪禮)를 폐지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이처럼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전통 상례나 제사를 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집안 사람들은 물론 이웃과 친지들은 이러한 행위를 묵과하지 않고 널리 알렸으며, 마침내는 지방의 관장과 조정에서가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신해년의 '진산 사건'이었다.
 
사건이 확대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잠시 몸을 피하였으나, 윤지충의 숙부가 체포되자 도리없이 피신처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윤지충 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일단 진산에서 문초를 받은 후 10월 29일에 전주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어 11월 8일 조정에서는 윤리강상죄(倫理綱常罪)를 적용하여 그들에게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내렸으며, 11월 13일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많은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저들은 천주만 있는 줄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는 줄을 모르며, 신주는 평일에도 부모와 조부모가 살아 계신 것처럼 섬기기 위한 것인데, 신주는 한 조각 쓸모 없는 나무토막이라고 불태워 없애고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제사를 폐한 일도 그러하거니와 매를 치며 자백을 받을 때에도 유혈이 낭자하였지만 신음 소리 한마디 없이 언제나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여 임금의 명령이나 부모의 명령은 어길지라도 천주의 가르침만은 비록 극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칼날 아래 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이만채 편, "벽위편" 및 "정조실록" 참조).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 감영에서 형벌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대답한 말이다. 훗날 이러한 순교 의지에 대한 표현은 순교자들에게 하나의 표어처럼 되어 버렸다.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막현리 인근에 묻혔고, 그들이 남긴 유물은 신자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이루는 기적의 도구처럼 여겨져 여러 사람이 지니고 다녔다 한다. 또 이로부터 4년 뒤인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성교를 공부하여 성인품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 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120여 년 뒤 그들의 순교 터인 전주 남문 밖에 아름다운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0호(1999년 11월호), p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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