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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면 살 수 있었나?

부산 교구에서 가장 오래 된 현존(現存) 공소인 살티 공소는 지금은 번잡한 관광지에 속해 있지만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박해 시대에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의 구실을 해주었던 것이다.
 
경부 고속 국도를 타고 언양 인터체인지에서 1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살티는 1875년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이 원인이 되어 치명한 김영제(베드로)의 묘가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교우터이자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의 고장이기도 하다.
 
언양 성당, 시외 버스 터미널을 지나 석남사 앞 주차장에서 1킬로미터쯤 더 간 곳에 살티 공소가 있다. 경상 북도 청도군, 경상 남도 밀양군·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가지산(1,230미터)의 중턱에 위치한 살티는 원래 예로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살터'라고 불리었다 고한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간월과 언양 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안살티로 피난을 와서 살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피난을 해서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살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여기에 1981년 11월 언양 본당 신자들의 정성으로 김영제의 묘소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묘지 주변은 후손들이 1984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중장비를 동원해 정지 작업을 해 둔 채 보존하여 오다가 '부산 교회사 연구소'의 주관으로 1994년 4월 2일 서북쪽으로 약 18미터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순교자의 5대손 김윤근(베드로) 신부가 울산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그리고 성모상 및 성지 표지석을 세워 묘역을 다듬었다.
 
살티 공소 인근의 간월골에는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큰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자수도 늘고 성전도 신축됐다. 하지만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성전은 불타 버렸고 교우촌은 폐허가 됐다.
 
이 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간월골의 몇몇 교우들은 깊은 산 속으로 피해야 했고 새로운 은신처로서 나무가 울창하고 맹수들이 득실대던 이곳 살티에 숨어들었다. 이 때 김영제(베드로)는 김종륜(루가), 이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됐다. 그 후 김영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울산 장대벌에서 치명하고 김영제는 다시 서울로 이송되어 9개월동안 무수한 매를 맞고 고종의 혼인일을 기해 석방된다.
 
하지만 그는 숱한 고문으로 반주검이 되어 살티로 돌아온 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마침내 1875년 숨을 거둔다. 현재 그의 묘소는 이곳 살티의 가족 묘소에 안장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도 이곳에서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 성인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최재선 주교, 김문옥 신부, 이종창신부, 김윤근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으로 자라났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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