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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토 되어 파수꾼으로

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 장승포시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는 순교자 윤봉문(?-1888년)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 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대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이곳이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됐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옥포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진다. 복음의 씨가 처음으로 옥포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 신부와 순교자 구 다두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1866-1873년) 중에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양산'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정(옥포리)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순교자 윤봉문(베드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1887년 11월 병인박해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보록 신부가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 입교시킨다.
 
그러나 그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어 윤봉문은 진수부, 주남이, 한상필 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두 뇌물을 주고 풀려 나지만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고 해서 통영으로 압송된다.
 
수차례에 거친 문초와 혹형을 받으면서도 그는 배교와 밀고의 강요를 결연히 물리치지만 결국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뒤 진주로 이송된다. 굵은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던 이 길에서 그는 칡넝쿨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주에 이르러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드디어 1888년 2월 22일 올가미에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에 안장됐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지금의 옥포인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이장된다.
 
그 후부터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라 불렀다. 그의 무덤에는 1978년 2월 24일 기념비가 세워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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