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끌려가다 |전장에서 만난 이태리수사 | 살인하는 죄만은 짓지 않게 하소서
고향길은 멀기만 한데 | 다시 시작된 신학교 생활 | 아름다운 금강산 | 총학생회 회장 | 피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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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서울 동성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원산에 있던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일제말 격변기로 모든 것이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내가 모처럼 신학과 라틴어 공부에 열중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일본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모든 학업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일본군의 징집이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거리에서 일본군에 끌려가는 동포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도 학도병 대열에 끼어 전쟁에 나가게 됐다. 처음 징집돼 간 곳은 평양의 44부대였는데, 나와 함께 징집된 군인 가운데는 한국인도 50명정도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일주일정도 머물다가 기차를 타고 중국 땅으로 이송됐다. 전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가던 나는 압록강변에 자리한 고향 집을 발견했다. 조그맣고 누추한 그 집이 그렇게 따뜻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따뜻한 저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자꾸만 작아지는 내 고향집은 이토록 내 마음을 애타게 했다. 하지만 나는 곧 이런 감상적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중국 땅 천진 쯤에서 타고 가던 기차가 중국 장개석 군의 공습을 받은 것이다. 폭격을 받아 온통 잿더미로 변한 아수라장속에서 나는 다행히도 크게 다친곳 없이 살아났다. 하지만 죽음이 항상 내 가까이 있음을 일깨워 준 크나큰 경험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주님의 눈길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그들을 힘있게 보호하고 굳건히 받쳐 주신다.(집회서 34:16)" 나는 성서의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전쟁의 공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냈다. 우리 부대는 다시 양자강쪽으로 내려 갔는데, 부대원 가운데 한국인 한 사람이 탈출하는 바람에 동행하던 한국인들은 다시 배치돼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나마 의지가 됐던 한국인 동료들과 떨어져 외톨이가 된 것이다. 그 후 내가 간 곳은 상해 인근의 조현이라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 부대는 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한 진지구축하는 일을 주로 했다. 매일 매일 산속에서 땅굴을 파는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간혹 최전방 부대에 군량미나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일도 맡아 했다. 후방 부대라 치열한 전투가 없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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