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것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 가보지도 못한 진남포성당 | 제주도 피난 생활
포로 수용소를 누비는 까마귀 신부 | 제너럴다드 사건 | 나를 홀대하던 하숙집 여주인
오토바이에 얽힌 이야기 두가지 | 말싸움 잘하던 외국인 사제들 |
드디어 전쟁 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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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속교구인 평양교구에는 갈수 없었지만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제 서품을 위한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드디어 11월 21일, 나는 서울교구 명동성당 제대 앞에 엎드렸다. 성인 호칭기도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제대 앞에 엎드린 나는 내 모든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리고 나의 사목 표어인 로마서 11장 36절의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그 분을 통하여 그 분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 분께 드립니다.라는 말씀대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청원했다. 이 땅의 백성들 모두가 목숨에 위협을 느끼며 비참하게 살아가던 시절이어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을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기를 더욱 간절하게 간구했는 지 모른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아 숨쉬기를 염원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지 않고서는 내 이런 간구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날 나와 함께 서품을 받은 동기는 모두 9명이었다. 김창석 신부를 비롯해 최명화, 김창문, 최익철, 이대권, 이종흥, 백응복, 김덕명 신부가 내 사제 서품 동기들이다. 나는 평양교구 소속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평양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돼 있었고, 교구장인 홍용호 주교의 행방도 알수가 없었던 탓에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날 서품식의 광경은 요즘과는 달리 무척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새 사제들은 어렵사리 제의와 수단을 구해 겨우 예를 갖출 수 있었고, 축하객들로 넘쳐나야 할 명동성당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서울이 수복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총성이 가시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도강증이 없는 사람들은 한강을 함부로 건널 수 없었기에 새 사제들의 가족들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들은 다행스럽게도 모두 자리를 함께 해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서품받은 삼촌인 장선흥 신부를 비롯해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고모와 할머니 등 나의 가족들은 무사히 상경해 내가 새 사제로 거듭나는 영광스런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특히 할머니와 고모는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고, 사제가 된 나를 무척이나 대견해했다. 나는 전쟁이라는 혼란속에서 얼떨결에 사제가 됐지만 목자의 길을 걷게 된 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스도의 참 평화와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기면 새길수록 내 어깨는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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