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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좀 빌립시다!" |신기한 상자 '카메라' | "No,
김치! No, priest!"
"나는 총이 없습니다." | 성체 거동 행렬 | 선풍기 채점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 .............................................................................................................................. |
휴전협상으로 전쟁이 일단락되고 난 뒤 1953년 9월, 나는 충청북도 감목대리구의 장호원 본당에 보좌 신부로 부임했다. 장호원 본당은 지금의 청주교구 감곡본당을 말한다. 당시 장호원 본당은 충청북도 음성군과 중원군 일대는 물론이고, 경기도 장호원지역까지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장호원 본당이 감곡본당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지난 1958년이다. 당시 충청북도 감목대리구가 서울교구에서 독립해 청주대목구로 설정됐는데, 서울교구는 경기도 장호원 지역에 새 본당을 설립하고, 그 이름을 장호원 본당이라고 붙였다. 때문에 기존의 장호원 본당은 본당이 위치해 있던 행정명을 따라 감곡본당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됐다. 청주대목구는 지난 1962년 3월 10일 '청주교구'로 승격됐다.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기존의 '대목구'가 모두 정식 '교구'로 승격됐기 때문이다. 어쨋든 내가 부임할 당시 장호원 본당은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장호원 본당 주임은 메리놀 회의 파디(James V. Pardy)신부가 맡았으며, 인천교구장인 나 굴리엘모(W. McNaughton)주교는 그 당시 장호원본당의 제2보좌 신부였다. 나는 보좌 신부이긴 했지만 본당 사목을 도맡아 해야 했다. 파디 신부는 내가 부임할 당시인 1953년 9월 16일 충청북도 감목 대리구의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됐고, 3개월뒤인 그 해 12월 청주로 부임하는 바람에 본당 사목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본당의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던 탓에 나는 본당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관할 공소 일에도 일일이 관여를 해야 했다. 본당 관할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가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몇 십리나 떨어져 있는 시골 공소를 걸어다니면서 사목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내가 인근 공소에 종부 성사를 주고 들어왔는데, 숨도 돌리기 전에 또다시 종부성사를 요청하는 신자 가정이 있었다. 걸어서 2,30리 길은 족히 가야하는 곳이었다. 내가 곧바로 채비를 차려 나가려하는데 나 굴리엘모 신부가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힘드실텐데 내가 가겠습니다." 나는 만류했다. "나 신부는 아직 한국말도 서툴고 밤길이니 내가 가겠습니다." "나도 신부입니다." 나 굴리엘신부는 극구 자신이 가겠다고 우겼다. 어쩔 수 없이 나 신부를 보내긴 했는데, 밤이 늦도록 나 신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부임한 지 며칠안돼 이 지역 사정에 어두운데다가 2,30리나 되는 먼 길이었고, 길이 얼어붙어서 혹시나 미끄러지지나 않았을까 몹시 걱정이 됐다. 나 신부는 한밤중이 되서야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찬 겨울 바람에 온 몸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성무를 집행하는데 열심이었던 나 신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파디 신부에게 제안을 했다. "신부님! 자동차를 좀 쓰도록 해 주십시오." 하지만 파디 신부는 자신의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라며 내 청을 거절했다. 마음이 언짢아진 나는 곧장 청주로 나가서 자동차 면허를 취득했다. 본당 신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면허를 취득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서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배운 운전실력을 발휘해서 쉽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디 신부에게 자동차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떼를 썼다. 얼마 후 나는 파디 신부의 자동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면서 관할 공소를 사목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