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협동 조합 태동 |서울대교구 사제로 입적| 성전을 지어 주님의 이름을 빛내자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꼬마 친구들 | "국제결혼은 하지 마십시오."|영부인에 대한 기억|도둑놈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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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에서의 유학생활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당시 청주대목구장이었던 파디(James V. Pardy)주교가 나에게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장호원 본당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보좌 신부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두달여 만에 서울로 올라 와야 했다. 드디어 '신용협동조합 운동'이라는 내 꿈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당시 국내의 사정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던 때였다. 계속되는 물가고와 식량난, 그리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취업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구호단체에서 지원하는 구호물자에 의존해 생활했고,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일하려는 근로의욕과 자립정신을 상실해 갔다. 외국 구호단체들의 지원이 잇따랐지만 그것은 그저 '자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또, 모두가 힘을 합해 노력을 다하면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 절실했다. 이 즈음 정부는 경제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경제 재건에 나서고 있었고, 캐나다 노바스코시아(Nova Scotia)주의 세인트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St. Francis Xavier University)에서 공부할 당시 세미나 등의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a Mulherin)수녀는 서민들의 경제, 사회적인 자립과 지위향상을 위한 신협 운동을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었다. 나는 1959년 8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후원을 얻어 서울 중구 소공동 74번지 경향신문사 5층에 사무실을 내고, 신협 운동에 대한 구상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울러, 그 해 10월 가톨릭 교회내 신자들로 구성된 '협동경제연구회'와 만나 협력방안을 모색하니 이것이 바로 한국 가톨릭 교회안에 신협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됐다. 나는 먼저 서울과 인천, 대구 등 전국 각 지역의 본당은 물론이고 서강대학교와 효성여자대학교 등 전국의 각 대학을 돌면서 신협 운동을 소개하고, 신협 운동이 왜 필요한 지에 대해 역설했다. 호응이 적어 맥이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신협 운동이야말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우리 국민들을 가난이라는 구렁에서 반드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순회 강연을 포기하지 않았다. "재산분포가 고르지 못한 사회에서는 대체로 실업자가 많고 고리대금업이 성행한다. 그래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모든 사회악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신협운동이야말로 이런 사회악을 방지하는 운동이다." "재산이 없는 서민들은 대부분 급한 일이 있어도 돈을 빌리기 힘들다. 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간편하게 필요한 돈을 융통할 수 있는 신용협동조합은 꼭 필요하다." "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정신과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협동하는 정신을 기르기 위해라도 신협운동은 널리 퍼져야 한다." 신협운동의 붐을 일으켜야겠다는 나의 생각은 종교의 벽도 뛰어넘었다. 개신교의 예배당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를 필요로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신협운동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렇게 전국을 누비며 강연한 횟수는 수백차례가 넘는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힘든 일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난이라는 구렁에서 해방돼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고, 잘 살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아울러 실제로 신협운동을 이끌어나갈 평신도 지도자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노동부에서 일하던 박희섭 씨를 비롯해 서강대학교의 임진창 교수와 곽창렬씨 등을 캐나다의 세인트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St. Francis Xavier University)의 코디 국제연구원의 사회 지도자 양성 과정에 보내는 일도 알선했다. 또, 가톨릭대학교에 출강을 하면서도 신협운동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해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신협운동의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드디어 1960년 6월 첫 결실을 맺었다. 서울지역에서 처음으로 신협이 조직된 것이다. 바로 '협동 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가톨릭 중앙신용협동조합'이 그것이다. 나는 가톨릭 중앙 신용협동조합의 첫 지도 신부를 맡았다. 아울러 나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편지를 들고 홍콩으로 갔다. 독일의 구호단체인 '미제레올(Misereor)'의 홍콩지부를 찾아 한국교회의 신협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무엇보다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이끌어갈 일꾼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렇게 해서 '미제레올(Misereor)'로 부터 교육기관설립에 필요한 돈을 지원받아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협동조합 연구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 후 신협운동은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신협은 이제 대표적인 서민 대중들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그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 즈음에는 바쁜 강연 일정 속에서도 나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지도 신부일도 맡아 했다. 삼촌인 장선흥 라우렌시오 신부가 선종하시는 바람에 그만둬야 했던 이 일을 조카인 내가 잇게 돼 감회가 남달랐다.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나는 수녀회의 미사 봉헌, 그리고 수련 회원 양성 교육, 영성 생활에 필요한 강의 등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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