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대가 무너졌어요!"|시흥본당 분가|"우리 땅, 돌려주시오."|집짓는 사제
종로성당을 지켜라|노동자들의 보루|빚하나 없이 지은 성전|영혼들의 안식처|"이놈들아! 성전에서 내려와!"
시장 사목 활성화|잠원동 교육관 건립|주옥같은 음악을 선사한 '파티마 성가단'|미사를 집전하다 쓰러지다
병상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올림픽 대회| 마지막 본당 수유1동|귀양살이가 따로 없다|사제생활 50년, 금경축

..............................................................................................................................
라질에서 돌아온 나는 후암동 성당에서 3년정도 더 본당사목을 하다가 1971년 6월 대방동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 대방동 성당에 와 보니 마치 시골의 어느 본당에 온 기분이었다. 넓디 넓은 성당 마당은 작은 덤불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무는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고, 온갖 잡초가 무성했다. 성당은 구호 물자로 지어진 건물이어서 낡고 초라했다. 사제관은 흙벽집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서도 많은 신자 수를 자랑하는 큰 본당 가운데 하나였는데 성전은 물론이고 주변의 환경이 말이 아니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벌레가 자신들의 마당으로 떨어져 살 수가 없으니, 제발 성당 마당의 나무와 잡초를 없애 달라는 요청이었다. 제때 살충제와 제초제를 치지 않아 성당 마당이 온갖 벌레들의 낙원이 돼 있었던 것이다. 또, 성당이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비만 오면 성당 뒤쪽의 축대 아래로 물이 새어 나왔다. 아랫 동네 주민들이 찾아 왔다. 큰 비라도 오면, 자신들의 동네가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에 축대라도 무너지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하루빨리 조치를 취해 달라고 했다. 심지어는 빨리 축대공사를 하지 않으면 "신부를 때려 죽이겠다"고 까지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우선, 조경공사에 착수했다. 정원수로 적당하지 않은 나무들은 베어내고 잡초들도 뽑아내 마당을 정리했다. 또 살충제와 제초제를 뿌렸다. 그리고 관악산의 돌들을 실어다가 마당을 꾸미기 시작했다. 성당 마당이 워낙 넓어 얼마나 많은 돌이 들어갔는 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장마때였다. 연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축대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새벽 미사를 집전한 뒤 보좌신부였던 이기정 신부와 함께 축대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꿍'하는 소리가 나더니 굉음이 연이어 들려 왔다. 바로 내 눈앞에서 축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엄청난 흑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높이가 8m나 되는 축대가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무너진 축대의 길이는 50m나 됐다. 엄청난 양의 흙더미가 도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인근 동네의 가옥들은 덮치지 않아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 일대 도로는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그 해 여름에는 큰 비가 내려 대방동 본당 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전체가 수해를 입어 난리였다. 한강이 넘쳐 한남동과 삼각지, 이태원 일대가 물에 잠겼으며, 자동차는 한강대교를 건너지 못했다. 강남쪽에서 강북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량진 근처에서 자동차에서 내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야 했다. 축대를 다시 짓는 일이 시급했다. 다시는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정확한 설계와 철저한 시공이 필요했다. 빗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었다. 옹벽도 튼튼하게 쌓았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는 일이 없어야 했다. 갑자기 추진하게 된 일이라 자금 확보가 시급했다. 이 때도 신자들은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보탰다. 나는 또, 당시 독산동에 있던 미군 부대를 찾아갔다. 지나가다 보니 야적해 놓은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축대를 짓는데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초면인 미군 사령관에게 염치없게도 목재를 그냥 줄수 없느냐고 물었다. 미군 사령관은 흔쾌히 목재 지원을 약속했고, 나는 그 목재를 가져다가 축대의 거푸집을 짓는데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사제관도 다시 지었다. 냉난방 시설을 갖춘,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래서 동료 신자들은 대방동 사제관을 '제2의 주교관'이라 부르곤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소성당 겸 회의실도 준공했다. 후암동 성당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철저하게 감독을 했다. 어느 새 내 손마디는 어느 노동자 못지않게 거칠어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또 한가지 별칭을 얻었다. '신학생 잡아먹는 신부' '신학생에게 일만 시키는 신부'였다. 하루는 대방동 본당의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봉사활동을 나갑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하고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은커녕 "다른 데서 봉사할 생각하지 말고, 본당 일부터 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 날 부터 신학생들은 성당 마당의 잡초 뽑는 일을 해야했다.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인 김운회 신부와 가톨릭대 교수인 오창선 신부가 신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오창선 신부는 잡초를 뽑다가 풀독이 올라 퉁퉁 부은 얼굴로 병원에 다녔었던 기억이 난다.

제 1부 | 제 2부 | 제 3부 | 제 4부 | 제 5부 |제 6부| 제 7부| 제 8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