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대가 무너졌어요!"|시흥본당 분가|"우리 땅, 돌려주시오."|집짓는 사제
종로성당을 지켜라|노동자들의 보루|빚하나 없이 지은 성전|영혼들의 안식처|"이놈들아! 성전에서 내려와!"
시장 사목 활성화|잠원동 교육관 건립|주옥같은 음악을 선사한 '파티마 성가단'|미사를 집전하다 쓰러지다
병상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올림픽 대회| 마지막 본당 수유1동|귀양살이가 따로 없다|사제생활 50년, 금경축

..............................................................................................................................
장단을 중심으로 활발한 신가 배가 운동을 전개한 결과 대방동 본당의 신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본당 분할이 불가피했다. 1971년 9월17일 시흥본당을 신설해 분가시켰다. 또, 대방동 성당에는 성가소비녀회가 운영하던 성모 유치원이 있었는데, 나는 유치원 건물도 수리했다. 그리고 후암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치원 원장을 맡았다. 될 수 있으면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나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서울 중앙 이사회 지도신부와 서울 교구의 참사위원을 역임했다. 당시에는 명동성당 입구의 가톨릭 회관 건물은 성모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길 건너편 '평화신문, 평화방송'사옥은 성모병원이 운영하던 산재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교구 참사위원으로 있으면서 두 병원을 잇는 육교를 건설하는 일에 관여를 했다. 또, 로얄호텔 건너편 다시 말해 명동성당 입구 오르막길 오른쪽에 있던 기숙사를 헐었다.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을 지으려고 추진하다 무산됐는데, 20여년이 지난 아직도 그 기숙사 자리에는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금싸라기 땅이 그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때 계획대로 건물을 지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제 1부 | 제 2부 | 제 3부 | 제 4부 | 제 5부 |제 6부| 제 7부| 제 8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