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

지금은 들녘에 온통 집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40여년전의 장호원 본당 인근 마을은 전형 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주민들이 땀흘려 농사짓던 들녘과 아름드리 나무 그늘에 앉아 한가롭게 장기를 두던 할 아버지들 그리고 논둑, 밭둑 길을 뛰어 다니던 아이들, 내가 기억하는 장호원은 이렇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움의 이면에는 늘상 가난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이 남겨놓은 상처와 농촌 사회의 구조적인 모 순 ?문에 농부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면하기가 참으로 힘들던 시절이었다. 급하게 돈 쓸일이 생 기면 주민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썼고,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빚은 늘어만 갔다. 추수한 쌀을 만지기도 전에 고스란히 고리대금업자에게 넘기기가 일쑤였다. 너나 할 것없이 가난했던 주민들은 신자, 비신 자 할 것없이 자주 성당을 찾았다. 미국의 구호 물자를 얻거나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성당에 다니면 먹을 것 , 입을 것까지 공짜로 얻을 수 있고, 돈도 빌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지어는 돈을 빌리기 위해 세례를 받는 주민들도 늘어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구호 물자를 주거나 돈을 빌려줘도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빚만 늘어가는 가정이 많았다. 아쉬울 때 성당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게 된 주민들은 어김없이 성당을 등졌다. '구호 물자도 떨어지고, 돈도 바닥이 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계속해서 이렇게 하다 가는 빌려준 돈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사람을 잃을 것이 뻔했다. 고질적인 농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고기를 그냥 줄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생산자 협동조합'이었다. 레이(James H. Ray) 신부도 '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고, 나는 우선, 탈곡기를 한 대 구입해 마을 앞 공터에다 설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동네 주 민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보자고 했다. 마을주민들은 추수한 쌀을 함께 탈곡하는 일을 시작했다. 탈곡하는데 드 는 비용도 줄이고, 다른 농가의 쌀을 탈곡해서 생긴 이익을 나누면 가난한 살림에 다소 보탬이 될까해서였다. 하지만 이 일은 생각만큼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이다. 우리 농촌의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텖다. 이렇게 애를 쓰는 나의 모습을 보고 충청북도 감목 대리였던 파디 (James V. Pardy) 주교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보다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전문적으로 공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협동조합운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캐나다의 안티고니쉬 운동을 소개해줬다. 평양교구 소속이었던 나는 평양교구장 캐롤 안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주저없이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같은 평양교구 출신인 윤공희 신부와 지학순 신부는 비슷한 시기에 로마로 유학을 떠났는데, 나중에 이들은 모두 주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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