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다음 사목지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 직책은 '유엔군 포로수용소 보조 군목'이었다. 수용소는 거제도 북 쪽 해안의 독봉산이라는
야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넓은 단지 안에는 수용소 천막 수백 채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수용소는
바깥 세상과는 철저하게 차단돼 있었다. 수용소 입구에는 항상 미군 헌병들이 배치돼 삼엄한 경비를 늦추지 않았다. 미군들이 보초 서
있는 곳을 통과해 철조망 하나를 더 지나야 포로들이 지내는 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같은 철조망 안에 갇혀 있었지만 포로들은
북한 포로와 남한 포로로 구별됐다. 북한 포로는 원래부터 좌익사상에 물든 인민군들을 말하고, 남한 포로는 어쩔수 없이 인민군에 끌려간
우익 포로들을 말하는데, 미군은 남북한 포로들을 구분해서 분리해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북한 포로들은 공공연히 김일성을 찬양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실권을 장악한
수용소 앞에 인민공화국기를 걸어 놓고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했다. 북한포로 수용소에는 공산주의자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민군
출신이긴 하지만 북한으로 석방되기를 꺼리는, 이른 바 반공 포로들도 뒤섞여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색출해내 인민 재판에 회부하고,
또 잔혹하게 때리고 죽이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수용소에서 어떻게 폭동이 일어났고, 몇 명이 살해되고 다쳤다는 흉흉한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곤 했다. 간혹 죽은 시체들을 깡통에 실어나오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었다. 나와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페티플랜(Roi
Petipren)신부는 이렇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북한 포로 수용소를 드나들며 사목활동을 벌였다. 북한 포로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반공주의자들도 뒤섞여 있었고, 이 가운데는 신자들도 있었다. 나는 겁도 없이 수용소들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고, 예비 신자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쳤다. 검정색 수단에 미사 가방을 들고 수용소 안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포로들은 '까마귀'라고 불렀다.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용소를 찾았다. 93수용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용소에 들어서자 마자
여기 저기서 "까마귀 온다. 까마귀 온다."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밀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신부님! 조심하십시오."하는 외침이 들렸고, 갑자기 교우 포로들이 나를 둘러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교우 포로들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이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곳에 두고 나온 교우 포로들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좌익 포로들에게 무슨 행패를 당할 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교우 포로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수용소 당국이 북한 포로수용소에 함께 있던 좌익포로와 우익포로를 분리해 수용하는 작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좌익 포로들 틈에 섞여 있던 교우 포로 50여명을 데리고 나와 안전한 수용소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좌익
포로들의 세력이 크지 않은 수용소에서도 교우들에게 둘러싸여 미사를 집전하곤 했다.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라도 언제, 어느
때 어떤 봉변을 당할 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무슨 배짱으로 수용소를 드나들며 선교를 했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나에게는 바깥 세상과 격리된 채 절망속에서 살아가는 포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삶에 대한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또 나를 손꼽아 기다리는 얼마 안되는 어린 양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또 한가지, 자신들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나를 도와 포로들을 하느님 곁으로 이끌었던 사목 회장들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피난와
있던 교우들 가운데 몇 명을 발굴해 내가 다하지 못하는 일들을 맡겼다. 김재근 토마스 회장을 비롯해 곽 회장, 표 회장, 현 회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포로 수용소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포로들에게 선포한 그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앙의
증거자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구해 온 종교서적들을 포로들에게 나눠 주면서 나를 대신해 포로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했다.
그 때 수용소 안에서 읽혔던 책들은 「요리문답」을 비롯해 「진리본원」,「종교의 근본문제」,「사억인의 신앙」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1년 남짓되는 기간동안 페티플랜 신부와 함께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세례성사를 준 사람은 8백명이 넘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