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리 타향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낄만도 했지만 나는 그럴 사이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농장 식구들을 돌보고, 인근의 교포 신자들을 방문하다보니
어느 새 약속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서울교구에서는 후임자를 선발했다는 연락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다만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기별만 보내 왔다. 게다가 농장 가족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후임자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자신들을 돌봐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나는 반년정도 더 버티다가 1967년 6월 서울로 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후임자로
임명된 김희선 신부와 함께 다시 산타 마리아 농장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당시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이 동행할 계획이었으나 보건사회부의
왕 과장이라는 분이 대신 갔다. 서울교구가 추진한 브라질 농업 이민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정부의 실무 담당자가 현지를 시찰하고,
또한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을 산타마리아(Santa Maria) 농장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농장 사람들은 이 보조금으로
추수기를 매입해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공식 일정을 마친 왕 과장과 내가 귀국하기로 한 날이었다. 카라카라(Cara Cara)라는
지역에 자신의 농장을 가지고 있던 조일행 회장이 왕 과장에게 자신의 농장에 잠시 들렀다 가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농장이 가는
길목에 있는 터라 왕 과장은 흔쾌히 동의를 했고, 나는 먼저 상 파울루(Sao Paulo)터미널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국인, 장 신부를 찾습니다." 바로 나를 찾는 방송이었다.
이어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동차 사고가 나서 왕 과장이 사망했으니 쿠리티바(Curitiba)시(市)
병원으로 빨리 가보십시오." 나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곳 영안실에는 함께 귀국하기로 했던 왕 과장이 누워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조 회장의 농장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유명한 관광지인 빌라벨랴 주립공원(Parque Estadual de Vila
Velha)근처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가 전복됐다고 했다. 동승했던 왕과장과 조회장은 사망하고, 조회장의 아들과 현지 동아일보 기자는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게 사람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 (마태 6,25-26) 정말
살고 죽는 일은 인간이 어찌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민 가족들을 충격과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김희선
신부는 폰타그로사(Ponta Grossa) 교구 주교좌 성당에서 농장 가족들과 함께 조회장에 대한 장례 미사를 치렀다. 주례는 폰타그로사
교구장인 펠란다(Geraldo Pellanda) 주교가 직접했다. 나는 쿠리티바(Curitiba)주지사의 전용 비행기를 얻어 타고
싸늘하게 식은 왕 과장의 시신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있던 한국 대사관으로 갔다. 그 곳에서 왕 과장의
장례를 치뤘다. 그리고 나는 귀국을 미루고 폰타그로사로 다시 갔다. 충격과 슬픔에 싸인 이민 가족들을 그냥 두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
